전쟁사 이야기 번외편 - 미국의 이순신, 엔터프라이즈호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구국의 영웅이나 창시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도 수없이 많은 명장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한국사 시간에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사부 장군, 강감찬 장군, 장보고 장군, 최무선, 이순신 장군, 손원일 제독 등등.
한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서울, 그 서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에는 떡하니 두 명의 한국사 민족 최고의 영웅 동상이 서있습니다. 우선 한글을 창제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한 세종대왕(광개토대왕 이후 유일한 대왕 칭호를 가지셨죠),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다움을 보이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최후를 다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
다만 이에 대해서 제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은 아직까지도 근현대사 인물 중에서 중심이 되거나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 듯 합니다. 예컨데 한국 산업 근대화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박정희 대통령, 그 이후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등.
제가 왜 갑자기 현대사 인물들을 열거하냐면, 당장 옆나라들만 봐도 우리랑 상황이 전혀 딴판인 것을 알 수 있거든요. 러시아에는 명목상 140%의 지지율을 받은 푸틴, 중국은 공산당의 지배 하의 그 최고 주석인 시진핑, 북한은 아직도 민족의 어버이라 불리는 김일성, 베트남은 위대한 독립유공자이며 한국에서도 존경받는 호치민,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미국은? 자기네 헌법을 만들거나, 혹은 분열된 국가를 대통합한 링컨이 있죠.
별 상관도 없는 서론으로 쓸데없이 분량을 잡아먹었네요. 이번 시간에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USS Enterprise CV6는 취역 당시까지만 해도 곧장 벌어질 거대한 전쟁의 주역이자, 홀로 미 해군을 떠받쳐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https://blog.naver.com/imkcs0425/60065277517)
미국에서 이 enterprise라는 단어는 항공모함에 쓰였다는 점 외에서도 이미 상당히 문화적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마치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나 '통일', '해방'이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에 비해서 더 무겁고 진중하게 쓰이듯이, 이 enterprise라는 단어는 미국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에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적인 수준의 초우량 대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애플 등 현대 서비스 기업부터 과거에는 포드, GM 등등의 거대한 기업들이 많았죠. 미국의 역사는 동부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로까지 서부를 개척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미지의 땅에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집과 농장을 가꾸는 일이 자주 일어났죠.
그러니 아직 미개척된 산업 분야를 새로이 개발하고 선도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큰 꿈이자 비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enterprise라는 단어는 우리에게는 '창업...?'정도의 무게감이 들지만, 미국인은 우리보다 더 진중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enterprise라는 함명을 받은 이 항모는 이러한 맥락에 걸맞게도 우연히(?) 태평양 전쟁을 이끌고 홀로 열세 속에서도 끊임없이 파괴당하고 수리되는 일을 반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비록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예산 부족으로 스크랩 처리(고철로 잘려서 팔려 나가는 것) 당했지만 이 엔터프라이즈 라는 단어는 현재 미국이 운용하는 핵항공모함이 이어받았습니다.
(엔터프라이즈 함명을 이어받은, 세계 최초의 원자력 항공모함이자 미국의 자부심이자 역사와도 같은 함선입니다. 원자력 항공모함은 보급 없이 장기간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항공모함의 대단한 혁신을 가져왔고, 그 혁신의 첫번째 이름은 미국 역사상 최강의 항모인 '엔터프라이즈'를 받아왔습니다.
오늘의 세계 역사 - 세계 최초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진수 (mehansa.com) )
다시 과거로 돌아와서, 1941년이 되자 동아시아의 정세가 슬금슬금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일본 제국은 드디어 그동안 참고 있던 광기를 내세우며 만주와 중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하였고, 이러한 행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은 비군사적 조치 등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유 수입량의 80%를 미국에 의지하던 일본으로선, 미국이 석유 공급을 끊어버리면 비축분이 바닥나는 3년 후에는 절름발이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본은 두가지 선택지를 마주합니다. 이대로 협상하고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3년 안에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터뜨려 굴복시켜버린다.
물론 우리는 일본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진주만 공습 1년 전인 1940년에는 영국이 이탈리아 항구에 정박된 함선들을 오로지 항공모함의 비행기들로만 사용하여 큰 피해를 입힌 '타란토 공습'이 발생했습니다.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치 장군은 이 전투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대로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의 주력 항모, 전함 부대를 기습적으로 괴멸시킨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웁니다.
10월 7일, 1941년 드디어 일본 해군은 항모 6척을 동원한, 30척에 이르는 대함대를 이끌고 몰래 진주만까지 다가갑니다. 비록 당시 미국은 여러 첩보망과 레이더망을 통해서 일본의 이상 징후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외교적 노력 또한 더 이상 해답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기에 분명 일본은 어디서부턴가 침공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하필이면 미국의 예상 지점은 필리핀이었습니다. 예, 지난편에서 말했던 가쓰라 테프트 밀약에서 미국이 조선과 맞바꿔먹은 그 필리핀이죠.
(일본 항모에서 발진한 대규모의 항공기들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전함을 어뢰 공격을 성공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당초 일본군의 계획은 미군의 항공모함부터 격멸할 예정이었으나, 엔터프라이즈는 폭풍우 때문에 하루 늦게 입항하여 이 기습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Attack on Pearl Harbor - Wikipedia )
(진주만에 정박된 미 해군 함정들을 향해 사방팔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는 절망적인 상황. 누구도 진주만이 공습당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일본 해군은 미국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거대한 작전을 들고 왔습니다
The Free Information Society - Pearl Harbor Attack: Map (freeinfosociety.com) )
진주만 공습 당시 엔터프라이즈는 허겁지겁 진주만 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일본 공격기들의 침공 방향으로 본대 남쪽에 일본 항공모함 부대가 있으리라 예상되어 엔터프라이즈의 공격기들은 진주만 남쪽을 샅샅이 수색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민했던 일본 해군은 일부러 비행기들을 삥 둘러서 사방에서 공격을 해왔기에 어디서부터 공격이 시작했는지 효과적으로 숨겼고, 그 덕에 일본 해군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후퇴합니다.
이로써 미 해군의 주축을 담당하던 전함들은 전멸하지는 못했으나 반수불구가 되어 뒤늦게 1943~44년에 수리가 되어서야 다시 전열에 참가합니다. 즉 이 빈 공간을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떠받쳐야 했던 것이죠.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사기는 완전히 개박살난 상황이었습니다. 복귀하는 아군 항공기를 적 항공기로 오인하여 사격, 격추시킬 정도로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당시 해군의 고위 장성들은 불명예 제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걸출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었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항상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하였으며, 자기 주관과 독단대로 작전을 펼치는 대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고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탁월한 용병술을 활용하여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미 해군을 재정비합니다. 그는 새로이 미 해군 제독의 자리에 올라 일본군과의 건곤일척의 싸움을 하게 됩니다
체스터 니미츠 - 세계 명장열전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니미츠를 비롯한 여타 미국 장교들은 진주만에서의 실패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무리 크고 튼튼한 전함이 있더라 하더라도, 결국 해전의 시대는 전함의 힘싸움에서 항공모함의 정보전, 요격전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미 서부 해안의 공창들은 정말 밤낮없이 항공모함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며, 1943년부터 차츰 실전배치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1943년 미국 항공모함의 전력이 급팽창하기 전까지 무언가 승부수를 한번 더 던져야 했었죠.
이 승부수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입니다. 앞선 칼럼에서 미드웨이 해전을 아주 자세히 다루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또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미 해군의 남은 3척의 항모를 완전히 아작내버리고 태평양에서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반대로 기습을 당하여 주력 항모 4척을 잃고 크게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물론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이 에터프라이즈 호는 혁혁한 공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의 분기점이라 할 수는 있었어도,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2편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엔터프라이즈가 얼마나 쌩고생을 하면서 일본 해군에 홀로 맞서 싸웠는지를 집중 조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사 시리즈
https://orbi.kr/00020060720 - 1편 압박과 효율
https://orbi.kr/00020306143 - 2편 유추와 추론
https://orbi.kr/00020849914 - 번외편 훈련과 숙련도
https://orbi.kr/00021308888 - 3편 새로움과 적응
https://orbi.kr/00021468232 - 4편 선택과 집중
https://orbi.kr/00021679447 - 번외편 외교전
https://orbi.kr/00021846957 - 5편 공감과 상상
https://orbi.kr/00022929626 - 6편 정보전
https://orbi.kr/00023174255 - 7편 실수와 인지오류
https://orbi.kr/00023283922 - 번외편 발상의 전환
https://orbi.kr/00023553493 - 8편 준비와 위기대응
https://orbi.kr/00023840910 - 번외편 비전투병과
https://orbi.kr/00024082234 - 9편 예상과 예측
https://orbi.kr/00024160983 - 10편 신뢰성
https://orbi.kr/00024418374 - 번외편 보안
https://orbi.kr/00024715925 - 11편 기출분석
https://orbi.kr/00025035755 - 12편 파일럿 교육 양성
https://orbi.kr/00025121266 - 13편 인적자원과 교육
https://orbi.kr/00025579054- 14편 설계사상
https://orbi.kr/00026239605 - 15편 독소전쟁
https://orbi.kr/00026862509 - 16편 목적과 효율
https://orbi.kr/00027274206 - 17편 현대전의 발전 양상
https://orbi.kr/00027336409 - 번외편 항공모함 시대의 도래
https://orbi.kr/00027382337 - 18편 러일전쟁
https://orbi.kr/00027503697 - 번외편 기만과 속임수
https://orbi.kr/00027559260 - 번외편 MHRD
https://orbi.kr/00027622118 - 번외편 미래의 전쟁
https://orbi.kr/00027786178 - 19편 의료전선
https://orbi.kr/00028148901 - 20편 중립과 군사력
https://orbi.kr/00028250151 - 21편 장전과 방아쇠
https://orbi.kr/00028339193 - 번외편 음식
https://orbi.kr/00028397136 - 번외편 잠수함
https://orbi.kr/00028594440 - 22편 단순함과 효율
https://orbi.kr/00028616772 - 23편 준비
https://orbi.kr/00028633462 - 번외편 기업가정신
https://orbi.kr/00028751436 - 번외편 단수와 보급
https://orbi.kr/00028918449 - 24편 자율성과 민주주의
https://orbi.kr/00028929569 - 25편 경험과 실패
https://orbi.kr/00028954207 - 26편 문화
https://orbi.kr/00029459571 - 번외편 인디아나폴리스 침몰사건
https://orbi.kr/00030326474 - 27편 낙엽이 지기 전에
https://orbi.kr/00031115960 - 28편 늑대떼와 양떼
https://orbi.kr/00031424411 - 29편 불공평하다
https://orbi.kr/00031680019 - 30편 명분과 세계관, 그리고 편견 (1)
https://orbi.kr/00031924410 - 31편 명분과 세계관, 그리고 편견 (2)
https://orbi.kr/00032009629 - 32편 명분과 세계관, 그리고 편견 (3)
https://orbi.kr/00032048830 - 번외편 미래전
https://orbi.kr/00032500068 - 33편 실험과 도전
https://orbi.kr/00032718240 - 특집 최선의 응전
https://orbi.kr/00033073626 - 21세기의 이순신, 손원일 제독과 대한해협 해전
https://orbi.kr/00033320700 - 번외편 조선의 근대사, 주미대사공사관
https://orbi.kr/00033748310 - 번외편 625 전쟁과 한국(국뽕?)
알고리즘 학습법(4편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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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이란 무엇인가(11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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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rbi.kr/00019535752 - 2편
https://orbi.kr/00019535790 - 3편
https://orbi.kr/00019535821 - 4편
https://orbi.kr/00019535848 - 5편
https://orbi.kr/00022556800 - 번외편 인치와 법치
https://orbi.kr/00024314406 - 6편
https://orbi.kr/00030479765 - 7편
삼국지 이야기
https://orbi.kr/00024250945 - 1편 일관성과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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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구쓰앵님 왜 무시해염 ㅠㅠ